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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강릉원주대학교 조형예술디자인학과 1학년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며칠 전, 친구들과 ‘요즘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 세가지’를 서로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각각 “네살 된 아이가 건치 대회 나갈 듯 활짝 웃을 때” “월요일마다 카드 회사에서 입금되는 소리가 휴대폰에 연속으로 울릴 때” “자기가 만든 요리가 정석대로라는 걸 손님이 알아주었을 때”라고 답했다. 내 차례가 되자 그들은 나름대로 추측했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와인 마실 때? 아니. 나의 대답은 “직구 사이트에서 인스턴트커피를 구매할 때”였다. 이것저것 살피다 보면 동화 같은 오후가 훌쩍 지났다. 왜냐하면 엄마는 엘살바도르 커피의 심오한 맛을 마다하진 않지만, 설탕이 적극적인 인스턴트커피의 단맛을 너무 좋아하셔서. 엄마가 “커피 마시고 정신 차려서 방에 가서 좀 잘래” 하실 때마다 정신 차렸는데 왜 주무시지? 갸웃하면서도 커피 가루 위에 칼로리를 줄인 설탕 대체재를 몰래 타드렸다. 나도 커피를 입에 달고 살지만 커피 내리는 법엔 너무 서툴렀다. 주변에 탁월한 바리스타 친구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배울 생각도 안 했다. 나에게 커피의 전문가적 식견이란 오직 마실 때만 도드라졌다. 나는 대신 커피 머신을 검색했다. 좋은 칼을 써야만 맛있다고 우기는 자취생처럼. 선후가 바뀌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나 말고 누가 내 삶의 순서를 정한단 말인가. 나는 우선 브랜드를 살핀 다음 추출 방식을 따졌다. 커피 단위 면적을 통과하는 물의 속도, 추출된 에스프레소의 온도와 시간, 커피 층의 수력학적 저항 계수를 파고들었다. 기계의 값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살 거라서. 그래도 점점 더 커피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액체의 무게를 측량하는 계량컵, 열을 정밀하게 재는 온도계, 그리고 커피 그라인더… 나는 약속시간에 맨날 늦으면서 시계 욕심이 많고, 중증 간경화면서 양조장에 가고, 운전도 못하면서 페라리 매장을 기웃거리는 사람과 똑같았다. 10년 쓴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땐 강건한 스틸 바디를 찾아 지구의 모든 냉장고를 뒤졌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구매 과정 자체가 번거롭고 전압도 다른데다 너무 비쌌다. 엄마는 늘 탄식하셨다. “좀 보통으로 살아라, 보통으로!” 심지어 우리 집에는 두 식구만 사는데 갖고 싶은 냉장고는 1400리터에 육박했다. 직관적이고 장엄한 네모 디자인은 산업혁명 시절로 나를 데려가줄 것 같았다. 냉장고 매장 직원은 아마 우리 집에 굶주린 가족 스무명이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706리터짜리로 얌전하게 타협을 보았다. 아쉬움은 없었다. 냉장고 때문에 부엌 확장 공사를 할 순 없으니까. 남들은 나더러 어머니를 공경하는 착한 아들이라지만 한 꺼풀 들추면 자기 예쁜 것만 아는 악동이 부엌 커튼을 젖히고 톡 튀어나올 것이다. 한마디로 부엌에서 내가 저지른 일은 주방 기구의 서커스였다. 나만의 조리법도 없으면서. 글쎄, 스테이크에 케첩을 뿌리며 장난치다가 혼난 기억 정도? 진지하게 달려들고 싶어도 어디서 본 게 너무 많았다. 스파게티 면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려고 벽에 면을 던진다거나, 고기 구워진 정도를 보기 위해 손바닥에 생고기를 같이 올려 높이를 비교하거나, 식초와 올리브유 비율을 극단적으로 맞추려다 목욕탕처럼 적셔진 샐러드를 만든다거나. 가만히 보니 나는 가공식품 회사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지식들을 무법천지 우리 집 주방에서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 불 위에 요리를 올리는 것은 예술 이전에 과학이다. 그래서 마트 천장까지 쌓인 다종다양한 라면이며, 올림픽 구기 종목 게임에 나갈 듯 알록달록 공 모양의 반이상적 아이스크림을 볼 때마다 왜 죄의식을 주는 음식이 맛있는지 생각한다. 입의 즐거움이 어떻게 몸의 건강을 물어뜯는지, 가공식품이라는 바퀴의 회전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갈지. 결국 낡은 요리책은 새로 쓰여야 할 것이다. 요리법에 적용될 과학 원리를 찾는 건 가공식품과 제조 과정의 관계에 꼭 들어맞지 않아도 무척 긴요한 일 같다. 예를 들어 공기 성분을 조작해 치킨의 질감대로인 물체를 합성한다면 모두가 희대의 닭 학살자가 된 요즘 얼마나 다행일까. 그런데 그건 과학일까, 환각일까. 어쨌든 가공식품의 신세계가 나날이 펼쳐질수록 집에서 뭘 해 먹는 사람들은 살짝 미친 과학자가 될 것이다. 어느 순간, 고기 온도계, 눈금 계량컵, 초민감 전자거울이 실험실 비커처럼 몰인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매일 뭔가를 찾는다. 도구에 관심 갖는 것은 분명 인간의 본성이며 요리를 잘할 수 있다는 약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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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의 세시반] 요리를 못하는 남자의 오묘한 생존법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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